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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마태복음

마태복음 2:1-12 왕의 귀환

by 그일라 2019.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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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12 왕의 귀환

 

[본문 읽기]

 

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2: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2: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2: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2: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2: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2: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2: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2: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주해와 묵상]

 

오늘의 본문은 세 개의 주제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동방박사들의 방문, 2) 구약의 메시아 예언, 3) 동방박사들의 예배. 세 가지 주제는 두 나라에 대한 극명한 구분과 분리가 담겨있습니다. 이제 하나씩 그 의미들을 살펴봅시다.

 

1. 동방박사들의 방문

 

‘헤롯 왕 때’라는 역사적 사건과 시간이 소개됩니다. 이곳에 등장하는 헤롯은 헤롯 대왕을 말합니다. 헤롯 가문의 실질적인 기원이 될 만한 인물입니다. [헤롯 가문에 대한 부분은 후에 다시 정리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스몬 왕조 이후 이두매인이었던 헤롯 가문은 로마와 결탁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게 됩니다. 정치 수환이 좋았던 헤롯은 로마로부터 ‘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고, 팔레스타인 지역과 이두매, 갈릴리 지역가지 통치하게 됩니다. 그는 왕이었지만, 유대인들이 볼 때 진정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짜 왕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체로 그들은 점술가들이며, 이방종교의 제사장들이 아닌 가 추측할 뿐입니다. 그들이 가져온 선물을 볼 때는 그들은 일반인들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왕족과 맞먹을 수 있는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동쪽(ἀνατολῇ)에서부터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기 위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은 듣고 소동(ταράσσω)합니다. 소동하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실 때 제자들이 유령인줄 알고 ‘놀라’ 소리 지를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마 14:26, 막 6:5) 그들은 너무 놀라 기겁할 정도로 경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지진으로 인해 땅이 요동치듯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은 요동쳤던 것입니다.

 

유대의 진정한 왕이 귀환하자 거짓 왕은 공포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요동하는 헤롯은 후에 예수님께서 만난 귀신의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했고, 공포에 떨었으며, 살려 달라고 빌었습니다. 이것은 귀신의 믿음입니다.(약 2:19) 헤롯은 포악하고 간교했지만 겁쟁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이 찬탈 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언제나 걱정했고, 노심초사(勞心焦思)했습니다. 세상의 헛된 것들을 구하는 사람들은 진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 앞에서 자신이 가진 권력과 부와 명예가 싸구려라는 것을 알고 노심초사합니다. 그리고 진짜를 소유한, 진짜인 그 사람을 제거하려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철저히 영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의인은 거짓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 앞에서 떨게 됩니다. 그리고 핍박합니다. 거짓된 평안을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을 이들은 과감히 자신의 거짓을 버리고 참되신 주님께 돌아갑니다.

 

2. 구약의 메시아 예언

 

헤롯은 ‘모든 대 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그 물음에 그들은 고민하지도 않고 즉각적으로 대답합니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이 구절은 미가서 5:2에서 예언한 것입니다.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런데 후반부는 마가서 5:4절에서 인용한 것인지 아니면 성경의 전체적 흐름 속에서 예언한 것인지 모호합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을 줄곧 ‘목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34장에서는 다른 곳보다 분명하게 하나님의 목자 되심을 소개하는 곳입니다.

 

에스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우리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어떤 곳에서 ‘목자’를 인용했고,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구약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또한 때가 되면 목자를 보내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도 알고, 하나님의 계획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기 예수를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좋은 것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어 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다니는 교회, 내가 구주로 고백하는 예수님은 누구신지 알고 싶어 합니다. 육적인 사람은 배고픔과 갈증을 느끼기 때문에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먹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영적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알고 싶어하고 아는 것은 당연하고 귀한 것입니다. 문제는, 성경은 많이 안다고 해서 믿음이 좋거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믿음 좋음의 결과는 낳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성경을 알려하지만, 성경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지식과 믿음이 결합되지 않은 불완전한 믿음,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죽은 지식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가 경고한 귀신의 믿음이 아닐까요?(약 2:19) 지식은 있으나 사랑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이며 죽은 믿음입니다.

 

3. 동방박사들의 예배

 

이제 마지막으로 동방박사들의 예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방문은 그들의 희생의 차원에서 다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정확하게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지만 결코 가깝지 않았을 것입니다. 현대에도 여행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안전을 보장 받지 못합니다. 지금부터 이천년 전은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개의치 않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또한 그들은 여행을 위해 많은 돈이 들었습니다. 직접 걸어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야 했다면 현대의 돈으로 환산해도 수천만 원은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드린 예물을 보십시오. 최고의 값진 것들입니다. 오직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그들은 헌신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헌신을 드리고 있는지 깊이 고민해 봐야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보기 위해 몇 달을 준비했습니다. 그들의 예물을 보십시오. 우리는 동방박사들이 드린 예물은 예수님의 사역을 드러내는 상징적 물질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황금, 유향, 몰약은 당시 가장 귀한 예물이었습니다. 황금은 부와 존귀를 상징하며 예수님의 왕되심을 축하하는 예물입니다. 몰약은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몰약나무에서 체취한 것입니다. 콤미포라 미르라(Commiphora myrrha)와 콤미포라 아비시니카(Commiphora abyssinica)라는 학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 줄기를 상처내면 그곳에서 송진처럼 액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을 몰약(沒藥, Myrrha)이라고 부릅니다. 몰약은 방부효과뿐 아니라 면역력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죽음을 이기는 능력을 가졌다하여 부활의 의미로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유향은 향을 내는 것으로 악취를 없애고 아름다운 냄새를 냈습니다. 여호와께 드리는 제단에(레 2:1-2) 사용되었고, 증거궤 앞에 두는 향에 넣었습니다.(출 30:35-36) 유향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방박사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신분의 사람들인지 알지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오직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머나먼 길을 왔으며, 자신의 소유를 일부 또는 대부분을 팔아 여행경비와 예물의 비용으로 지불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동방박사들의 예배를 보며 우리 자신들을 돌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위협뿐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많은 것을 예배에 쏟아 부었습니다. 어찌 보면 생산성이 전혀 없고, 실리적인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예배하길 원했고,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희생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얼마나의 희생이 있으며, 가치를 드리고 있을까요? 누구를 말하기 전에 제 자신을 봐도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나가면서

 

오늘은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성경을 알지만 삶으로 드러내지 못한 종교지도자들을 봅니다. 또한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오직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른 동방박사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헌신이 따르지 않는 삶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며, 무엇을 가장 가치있게 생각합니까? 마태복음은 진정한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왕이 오셨습니다. 소동하지 말고 경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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