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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마태복음

마태복음 1:18-25 예수의 탄생

by 그일라 2019.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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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8-25 예수의 탄생

 

[본문 읽기]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1: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주해와 묵상]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마지막 여인이 등장하면서 족보의 이야기는 제2막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레위지파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족보는 그녀가 유다 지파였다고 말합니다. 외경에 속하는 야고보서 10:1에서 마리아가 ‘다윗의 지파’로 소개됩니다. 그러나 누가의 소개에 의하면 레위 후손인 엘리사벳이 사촌으로 언급되기 때문에 레위지파가 됩니다. 어떤 이유에서 이러한 이중 기록이 있는지 모르지만 결코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여인은 아닙니다. 요셉이 유다 지파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다지파의 다윗의 후손으로 소개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마리아

 

가장 먼저 눈여겨 볼 대목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 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요셉이 아닌 마리아가 중심인물입니다. 마태는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1:18)했다고 서술합니다. 예수님의 나심은 마리아를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이유는 마리아의 갑작스러운 임신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남편과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인이 홀로 임신했다는 것은 죽어 마땅할 일이었습니다. 율법은 엄격히 이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2:23-24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마태는 요셉이 의롭기 때문에 가만히 끊고자 한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논란이 있습니다. 요셉이 보기에 마리아가 진짜 간음을 행했다면 율법으로 사형에 처하는 것이 ‘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분명 구약의 ‘의’가 아닌 신약적 의미에서 의를 적용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못 박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고자 할 때 천사가 나타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다시 강조합니다.(1:20)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순종합니다. 요셉의 순종에는 만약 마리아가 간음죄로 오인 받는다해도 자신이 감수하겠는 결단이 담겨져 있습니다. 마태는 즉각적으로 마리아의 잉태를 이사야 7:14을 인용해 성취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은 이사야가 아하스 왕에게 약속한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으로 하나님을 불신하는 아하스 왕에게 보내는 경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태는 이것을 예수님을 통해 성취 되었다고 선언함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확인시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즉 ‘하나님의 영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하심이 분명하다.’ 이런 의미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예수, 죄에서 구원할 자

 

마태는 예수라는 이름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구원자라는 뜻을 가진 예수는 구약의 여호수아, 또는 예수아의 헬라식 표현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 뜻을 예수라는 이름에 ‘그들의 죄’라는 신학적 해석을 가미시킵니다. 현대인들에게 이 표현은 뻔한 것으로 들리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마태의 해석은 경악스러운 것이며, 신성모독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이것을 예수님께 적용시킴으로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성전이시며 속죄 제물이신 예수님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성전에서 드려졌든 속죄제와 화목제 등의 속죄의 기능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속죄를 거침없이 받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기꺼이 기존의 인식의 틀을 깨고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할 분으로 소개합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이 미묘한 마태의 표현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라 하니라’는 먼저 그 기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신의 소원이나 갈망 때문에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순종을 통해 이름이 되었습니다. 마치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명명된 것과 같습니다. 또한 아담에게 동물을 이끌어 오셔서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이름은 곧 존재이며, 속성이며, 방식을 결정합니다. 예수라 부름으로 예수, 즉 구원자로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그것이 이름이 되고, 이름은 곧 사명을 담아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들이란 의미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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