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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서/시편

[시편 강해] 시편4편 저녁기도(개인애가 및 신뢰시)

by 그일라 2019.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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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강해] 시편4편 

저녁기도(개인애가 및 신뢰시)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장르구분]

 

개인 애가 또는 신뢰의 시

 

대체로 개인적인 애가로 분류합니다. 하지만 여호와에 대한 강한 신뢰를 전제하고 있어서 신뢰의 시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강해]

 

시편4편은 3편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제목은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로 소개합니다. 제목은 편집할 당시 사용되었던 관례를 따라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탄식의 기도를 시작하여 인생의 헛됨을 바라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자신에게 기쁨을 주었다고 고백하며 평안히 눕고 자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김정우는 네 개의 장으로 구분했습니다.

1. 1-2절 높은 자들에 대한 고발

2. 3-5절 악인을 향한 반성의 촉구

3. 6절 애통과 기원

4. 7-8절 기쁨과 안식

 

제가 보기에 김정우의 구분은 약간 모호해 보입니다. 오히려 피터 크레이기의 구분이 더 옳아 보입니다.

 

1. 1-3절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2. 4-5절 여호와에 대한 신뢰

3. 6-7절 신뢰와 확신 가운데 드리는 기도

4. 8절 평안한 안식

 

마지막 8절을 따로 구분함으로 주제를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약간 생각이 다릅니다. 1절과 6절을 간구를 중요하게 보고 따로 구분했고, 다음 구절을 대응 구절로 보았습니다. 필자는 내용을 따라 아래와 같이 구분합니다.

 

1. 1절 탄식의 간구(1)

2. 2-5절 인생에 대한 교훈

3. 6절 탄식의 간구(2)

4. 7-8절 여호와에 대한 확신

 

1은 3과 대응하고, 2는 4와 대응합니다. 간구로 시작하여 헛된 일을 구하는 인생들에 대한 권면(2절), 하나님을 조롱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이기를 간구함(6절), 마지막으로 자신 안에 숨겨있는 기쁨과 평안을 노래합니다. 3편은 ‘아침 기도’에 해당되며, 4편은 ‘저녁 기도’에 해당됩니다. 크레이키는 저녁 제사 때 이 시를 낭송했다고 말합니다.

 

다음의 반복에도 주의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부르다 베카리(1절) 제카리 (2절)

의 치드키(1절) 체데크(5절)

듣다 쉐마 (1절) 이쇄마(3절)

마음 레바브(4절) 리비(7절)

 

1. 1절 탄식의 간구(1)

 

1절에서는 ‘의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6절에서는 ‘여호와’로 부릅니다. 여호와가 친밀함과 구원의 이름이라면, ‘하나님’은 힘과 능력을 의미합니다. 창조와 권세를 드러낼 때 종종 여호와가 아닌 하나님을 사용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의’로운 분으로 소개합니다. ‘의’는 ‘바르다’ ‘곧다’ ‘옳다’는 뜻입니다. 이 고백은 자신이 억울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김정우는 ‘인생들아(베니-이쉬)’를 ‘고관대작’으로 해석하여 그의 싸움이 만만치 않음을 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베니-이쉬는 권력자들에 대한 표현일 경우가 많고, 일반 사람들일 경우 ‘베니-아담-으로 사용됩니다.

 

다윗은 궁 안에서 신하들에 의해 적지 않은 압박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왕이 신하들에게 휘둘린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지 모르지만, 삼하19장에 의하면, 압살롬의 죽음 앞에 애통하는 다윗을 요압이 책망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요압은 비록 다윗의 군대장관이었지만 다윗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실세인 것이 분명합니다. 후에 솔로몬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면서 ‘스루야의 아들 요압’에 대해 주의를 줍니다. 그가 남북이 갈라져 대처할 때 항복한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이 때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에게 요압을 제어할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왕상 12:5-6
5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6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사무엘하를 보면 요압이 아브넬을 죽였을 때 요압의 인물됨을 발견하고 자신의 신복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삼하 3:38-39
38 왕이 그의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이러한 정황들은 다윗이 궁 안에서도 고통당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1절은 자신의 고통의 시간들 가운데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회상하며 다시 기도에 응답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2. 2-5절 인생에 대한 교훈

 

2절은 다윗의 고백이 아니라 시편 2편 1-2절에 근거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선언을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인생(베니-이쉬, 통치자)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ㄱ. 어느 때까지

 

2절의 이 표현은 하나님의 오랜 기다림을 말합니다. 참고 기다리십니다. 하지만 종말의 때는 오고,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전에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하고, 헛된 일을 좋아하고 꾸밉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게 하는 일은 우상을 숭배를 뜻합니다.(김정우) 거룩해야할 통치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곧 거짓된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 보고 계시는 하나님은 답답할 뿐입니다.

 

ㄴ. 너희는 알라

 

3절은 두 번째 경고로 적들을 향하여 ‘너희는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알아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1)경건한 자를 택하고, (2)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선택과 기도 응답은 우상숭배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능동적으로 개입하시고, 선택하십니다. 또한 택하신 백성들이 기도할 때 기꺼이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우상은 선택할 수도 기도에 응답하지 못합니다. 갈멜상 정상에서 엘리야와 바알 숭배자와 결투처럼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ㄷ. 두려워하라

 

마지막은 실제적 경고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았다면 인생들은 당연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동안 사람들 앞에서 떠들며 거짓와 악을 일삼았지만 이제는 조용히 아무도 듣지 못한 곳에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심중에 말하라’는 ‘말하라’는 뜻이 아니라 말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ㄹ. 의의 제사를 드리라

 

‘의의 제사를 드리라’는 우상숭배를 버리고 오직 여호와 만을 섬기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의 하나님’(1절)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만을 예배하는 것 자체가 ‘의’입니다.

 

3. 6절 탄식의 간구(2)

 

6절에서 분위기가 갑자기 전환됩니다. 마치 포로 상황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조롱당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한 입으로 이 세상에는 선이 없고, 오직 악만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심판자도 없으니 우리가 마음대로 악한 일을 일삼겠다는 악인들의 포효입니다. 시인은 악인들이 득세한 상황 속에서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여호와의 주의 얼굴을 비추소서’는 심판해 달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 현현을 뜻합니다. ‘얼굴을 비추소서’는 ‘얼굴에 있는 빛을 비추소서’와 동일한 말입니다.

 

4. 7-8절 여호와에 대한 확신

 

마지막 두 절은 현재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고백합니다. 7절에서 기쁨은 ‘주께서 내 마믐에 두신’(7절)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위로나 상태가 아닌 오직 여호와로 인해 오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기쁨은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한 것입니다. 음식이 귀했던 고대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창곡의 곡식과 새로 딴 포도로 만든 포도주는 위로와 활력이었습니다. 일 년 동안 평안히 살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박국 3:17-19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도 여호와를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평안히 잘 수 있게 됨을 감사합니다. 평안한 잠을 취할 수 있음도 ‘오직 여호와’(8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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